[신간] 백범일지

  • 입력 2026.09.12 10:05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돌베개 제공

「백범일지」(부제 백범 김구 자서전, 개정증보판)이 2026년 9월 14일 나왔다. 지은이는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이다. 펴낸 곳은 돌베개이다.

분야는 역사, 정가는 19,000원, ISBN은 9791124669105이다.

책소개는 다음과 같다.

백범 탄생 150주년, 2026 유네스코 백범의 해 기념 전면 개정증보판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백범 선생은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30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1945년 해방하던 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도 20년의 긴 여정을 마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갔건만, 백범 선생은 전 생애를 걸고 처절하게 싸웠음에도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삼팔선에 가로막혀 지척의 고향 땅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가 남긴 『백범일지』는 위인전기가 아니며, 일기도 아니다. 사선(死線)에 선 아비가 두 아들에게 남긴 절절한 유언이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운 50여 년 투쟁의 기록이다. 구한말부터 근현대까지 우리나라를 떠받친 이름 없는 범부(凡夫)들의 기록이다. 백범 선생을 위대한 사상가로,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남긴 아버지의 심정을 떠올리면서, 백범이 기록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범부들의 투쟁의 역사를 꼼꼼히 읽어 보자. 주해본에서 정본화 작업을 거쳐 전면 개정증보판으로, 철저한 고증과 깊어진 주석으로 만나는 가장 완벽한 『백범일지』 『백범일지』(1947, 국사원) 출간 50주년이 되던 해인 1997년에 돌베개출판사는 주해본 『백범일지』를 펴냈고, 2002년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에서 주요 도서로 선정된 뒤 현재까지 100쇄에 이를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5년에는 모든 세대의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주해본의 각주를 없애고 본문의 중복과 혼란을 간결하게 정리한 『쉽게 읽는 백범일지』를 펴냈으며, 이 책도 이미 50쇄를 넘어섰다. 그리고 2016년에는 백범 탄생 140주년을 맞아 백범 선생의 숨결까지 구현한다는 목표 아래 원본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탈초한 『정본定本 백범일지』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주해자인 도진순 교수는 2018년부터 현재까지 『백범 연보』(근간) 작업에 매진하였고, 최근에 그 초고를 탈고하였다. 백범 선생의 연보를 쓴다는 건 백범 선생의 탄생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모든 생을 관통하는 역사를 쓴다는 것이며, 도 교수는 이 과정을 통해 백범 선생의 일생을 ‘그의 시대’ 속에서 재조명하고 『백범일지』 행간의 글을 볼 수 있었다. 개정증보판 『백범일지』는, - 상권과 하권, 해방 이후의 일을 기록한 ‘계속분’과 「나의 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정본 백범일지』의 근대 국어 문장을 원전의 맛을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좀 더 쉬운 현대문으로 바꾸고, 원문을 소개하는 주석을 줄였다. - 현장감을 높이는 사진과 지도 80여 장을 엄선해서 요소마다 수록하였다. - 장절 구분과 제목을 개편하여 『백범일지』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중국 현지음으로 바꿔주었다. - 『백범일지』는 수십 년 이전을 회고한 내용이고, 선생조차 헷갈리는 부분은 모친인 곽낙원 여사에게 물어보고 보완했다고 하니 당연히 시기의 선후가 혼재되거나 전도된 경우가 많고, 고유명사의 오류 또한 상당히 많다. 이 책에서는 본문의 서술 순서를 준수하면서 연보 작업의 성과를 반영하여 연·월·일을 바로잡고 사건의 선후 관계를 바로잡으면서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인명 및 지명의 표기 오류 등도 모두 바로잡았다. 백범의 글이 아닌, 도 교수가 바로잡은 내용들은 〔 〕에 담아 원문 옆에 부기하였다. 1997년부터 30년에 걸친 꾸준한 출판 작업으로 인해, 돌베개출판사의 『백범일지』는 독자들에게 가장 모범적이고 표준이 되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번에 펴내는 개정증보판 『백범일지』는 독자들이 만나는 가장 완벽한 『백범일지』가 될 것이라 자부한다. ‘백범’白凡을 만든 뭉어리돌 정신, 가장 낮은 이들의 애국심이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1911년, 백범 선생은 경성총감부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밤낮으로, 도살장에서 소와 돼지를 때려잡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고 들린다.”(『백범일지』) 여덟 번째 신문을 받던 날, 백범 선생을 고문한 일본인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동류가 대부분 자백하였거늘 너 한 놈이 자백을 않으니 심히 어리석고 완고하다. 토지를 사들인 지주가 논밭에서 〔쓸모없는〕 뭉어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네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으려 하지만, 여러 놈의 입에서 네 죄가 발각되었으니,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때려죽이리라. 여기서 ‘뭉어리돌’은 못생기고 쓸모없는 돌로, 둥글둥글한 ‘몽우리돌’과는 다른 것이다. 일본인의 말에 백범 선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논밭의 자갈돌로 알고 파내려는 그대들의 노고보다, 파내어지는 나의 고통이 더욱 심하니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 미친개 모양으로 분기탱천해서 죽도록 매질하는(『백범일지』의 표현 그대로다.) 왜놈이 백범 선생을 뭉어리돌이라 하는 것에 대해 선생은 오히려 기뻐하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어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어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는 생각을 깊이 새겼다. 백범 선생은 가장 천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평범한 ‘범부’(凡夫)의 ‘범’(凡)을 따서 자신의 호를 지었다. 백범 선생은 뭉어리돌처럼, 백정처럼, 범부처럼 가장 낮고 평범한 이들이 주체 의식을 가지고 애국심을 가질 때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범일지』는 백범 선생의 유서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국무령〕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1928~1929년〕,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하권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基地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1941~1942년〕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美洲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었다. _「출간사」 중에서 1929년에 탈고한 상권은 백범 선생이 일제의 침략이 극에 달하자, 고국에 있는 두 어린 아들(김인, 김신)에게 아비가 걸어온 길을 알리기 위해 유서 형식으로 집필했다. 어린 시절부터 동학 입문, 치하포 의거, 그리고 상하이임시정부 초기 활동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1943년에 탈고한 하권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집필되었다.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해 한국광복군 조직 등 한인애국단과 임시정부의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과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해방 이후 고국에 돌아온 백범의 활동을 기록한 것을 ‘계속분’에 담았고, 1947년 ‘국사원판’ 출간 당시 책의 말미에 부록 형태로 수록한 것이 「나의 소원」이다. 침략하지 않는 나라,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 해방 공간은 논쟁의 영역이다. 많은 인물이 재평가되고 있지만, 백범 선생의 위상은 다르다. 「나의 소원」을 쓴 해인 1947년은 해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 분단이 가시화되고, 국내적으로는 좌우익의 극심한 이념 대립과 파벌 싸움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백범 선생은 우리 동포가 중심을 잡고 통일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주적 민족 철학을 제시하고자 이 글을 발표했다. 「나의 소원」의 핵심 내용은 크게 세 부분(‘민족국가’, ‘정치 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으로 나뉘며 두 가지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대답은 오직 하나, “대한 독립”이며, 그다음도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글은, 우리 주권으로 세운 당당한 독립국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또한 백범 선생은 우리나라가 군사 강국이나 경제 대국이 되기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개정증보판을 펴내며 일러두기 출간사 [상권] 인·신 두 아들에게 황해도 벽촌의 어린 상놈 조상과 가정 / 난산의 개구쟁이 / 궁핍한 글공부 붓을 던지고, 총을 들다 과거 낙방, 붓을 던지다 / 동학에 투신, 김창수가 되다 / 열아홉 살의 팔봉 접주,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다 / 동학이 동학에 패하다 / 청계동 안 진사에게 의탁하다 / 스승 고능선 청나라 군대와 연대하는 의병의 길 북행: 평안도와 함경도 / 청국 탐문 / 청국 무장 서씨 / 김이언 의병과 강계성 공격 실패 / 인연 없는 양반 스승의 손녀사위 치하포사건과 탈옥 일본인 쓰치다를 죽이다 / 첫 번째 투옥: 해주옥 / 인천 감리서 감옥으로 압송 / 역사적 신문, 영웅의 탄생 / 옥중왕 / 김주경의 구명 운동과 부모님의 소장 / 탈옥: 심야에 삼릉창을 들고 피신과 잠행: 중, 거북 한성으로 / 삼남: 피신과 견문 / 마곡사에서 중이 되다 / 평양 영천암의 장발 걸시승 / 은인 김주경을 찾아 강화로 / 심심산촌에서 거북이 되다 / 스승과의 신구 논쟁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부친상, 기독교, 미혼 처의 죽음 / 장련: 권상위원, 교육 운동, 결혼 / 을사늑약과 상경 투쟁 / 교육 운동과 하기 사범 강습회 /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 / 두 번째 투옥과 안중근 의거 / 재령 여물평 보강학교와 나석주·이재명 옥중의 ‘뭉어리돌’, 백범이 되다 신민회와 안악사건 / 세 번째 투옥: 경성 경무총감부, 고문과 기절 / 기약 없는 15년 형 / 경성감옥에서의 심리 변화와 뭉어리돌 정신 / 옥중의 면면들 / 옥중의 의·식·주·행 / 불한당 괴수 김 진사 / 백범 김구가 되어 다시 인천감옥으로 상하이 망명과 임시정부 가석방 / 농감 생활 / 상하이 망명 / 임시정부: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 내 인생을 돌아보며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상하이임시정부: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상하이 도착 / 문지기와 경무국장 / 분열: 사상 갈등, 모스크바 자금, 국민대표대회 / 문전걸식하는 국무령의 ‘편지정책’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일본영감’ 이봉창 / 일본 천황, 불행부중不幸不中 /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 훙커우공원의 쾌거 광둥런 장전추 위기일발의 상하이 탈출 / 자싱 피난 생활 / 활동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하이엔 피난 / 옌자방의 시골 농부 / 여사공 주아이바오와 선상 생활 다시 항일 전선으로 난징 치루에서 장제스와 야밤 극비 회동, 뤄양군관학교 / 한국국민당 조직과 임정 국무위원 복귀 / 난징: 밀정, 폭격, 주아이바오 / 어머님과 두 아들: 이별과 재회 / 창사: 가슴에 박힌 총탄 충칭임시정부와 광복군 만리장정으로 전시 수도 충칭에 / 죽음과 탄생: 어머님과 한국독립당 / 광복군 창설과 여성 광복군 / 대륙에 묻힌 영혼 [계속분] 해방 전후의 임시정부과 광복군 탈출 학병들의 임정 청사 도착 / 한미 합동 국내 침투 훈련 / 왜적의 조기 항복 / 해방 직후 충칭에서의 임정 / 충칭과 투차오 생활, 일제의 대공습 / 14년 만에 상하이로 돌아와서 조국에 돌아와서 27년 만에 감격의 환국 / 투옥과 은신의 자취를 찾아서(인천옥, 마곡사) / 유방백세: 삼 의사 유골 봉환과 안장 / 삼남 순회 / 유인석과 김주경, 시조 경순왕을 찾아서 [나의 소원] 민족국가 / 정치 이념 /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미주 참고문헌 백범 김구 연보 찾아보기

지은이 소개는 다음과 같다.

김구 (金九) (지은이)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 · · · · · · · · ·

관련기사

▶ 광명교육지원청, 스마트폰 대신 독서·예술·체육 채운다…2026 정책설명회 개최

· · · · · · · · · ·

한국사회복지저널은 AI 기술의 도움을 받아 보도자료와 복지 정보를 보다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NEWS 참여포털
내 지역 날씨·재난·복지를 한 곳에서
폭염경보부터 고속도로 사고까지, 오늘 필요한 것만
withnews.co.kr →

저작권자 © 한국사회복지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