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선정
국가보훈처,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선정
  • 정진욱 기자
  • 승인 2019.03.3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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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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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복지저널 정진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29일 보도자료를 통해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창호(1878.11.9.~1938.3.10.) 선생을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江西郡 草里面 七里)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태어나 1896년 18세 되던 해에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를 맡아 학생을 지도했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해 귀향하여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해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를 통해 사회와 민족에 대한 소명의식과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깊게 자각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02년 결혼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리버사이드 일대의 한인지도자로 부상했다. 1905년 4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목표로 삼는 미주 한인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1907년 5월 공립협회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언론활동과 교육진흥, 실업진흥 등 여러 가지 구국사업을 전개하고 이후 공립협회는 1909년에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와 통합되어 1910년 5월 10일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선생은 조국 독립을 추구한 국내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13년 5월 13일, 8도 대표를 선정해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 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서 흥사단이 출범하고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조직된 흥사단은 무실역행.충의용감.건전인격.단결훈련.국민개업(國民皆業)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양성을 통한 민족독립의 사명 완수에 매진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달되자 3월 13일에 대한인국민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하고 이때 ‘삼일운동을 계승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그리고 파리평화회의 개최와 같은 외부적 요인보다 민족의 실력을 보여준 3.1운동이 훨씬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선포했다.

 

3·1운동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결실을 맺자 1919년 5월 25일에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고 이후 임시정부의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정부에는 국민이 있어야 하므로 먼저 인구조사에 착수하고 정부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 확보를 위한 국채 발행을 비롯해 인두세 징수, 구국재정단 조직 등 여러 정책을 고민했다.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자, 같은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던 선생은 민단장으로 오인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후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는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했다. 

 

곧이어 일제는 국내의 민족운동 일체를 말살하기 위해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을 일으켰다. 그로인해 선생을 비롯한 180여 명의 동우회 회원들은 종로경찰서로 넘겨져 135일간 집중조사를 받고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은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되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0시 5분에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했다.

 

해방 후 1973년에 정부는 선생 탄신 95주년을 맞이하여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선생의 유해와 그의 아내 이혜련의 유해를 이장하여 도산공원 묘지에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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